600년이 넘은 아주 오래된 동네
정동은 1396년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 씨의 능인 정릉(貞陵)이 조성되면서 붙여진 지명이다. 정릉은 조선 태종 때 도성 밖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졌지만 옛 지명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 따지면 정동은 600년이 넘는 아주 오래된 동네인 셈이다.
정동에는 길이 있다. ‘걷고 싶은 길 1호’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꼽힌 너비 18m의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정동길’이다. 정부가 2014년 도로명 주소를 전면적으로 시행하기 전까지 세인들에겐 ‘덕수궁 돌담길’로 알려졌다. 하지만 덕수궁 돌담길은 정동길의 일부일 뿐이다. 정동길은 덕수궁 대한문에서 정동로터리를 지나 경향신문사 건물이 자리한 곳까지 이어져 있다.
정동길에 흩뿌려진 시대의 아픔과 좌절
역사를 시간의 궤적 속에 축적된 인간 문명의 기록이자 삶의 창고로 규정한다면 정동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품고 있는 공간이다. 시대의 아픔과 좌절, 민주화의 열망과 한숨이 배어 있는 곳이다. 역사의 흔적들은 정동길 양쪽에 늘어서 있는 건축물에 남아 있다.
정동공원 위쪽에 있는 옛 러시아공사관은 고종이 세자(순종)와 함께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했던 곳이다. 한국전쟁 때 파괴돼 지금은 골격만 남아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흰색 벽돌조 건물에 다가서면 을미사변 이후 일본과 러시아의 틈새에 끼어 자주권을 상실했던 고종의 탄식이 들리는 듯하다. 주한 미국 대사관저와 담을 잇대고 있는 덕수궁 중명전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이다. 일제에 국권을 찬탈당하는 치욕을 겪은 것이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1907년 중명전에서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 세계 각국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대한제국은 1910년 허무하게 멸망했다. 일제강점기 정동은 통절(慟絕)의 땅이 됐다.
민주화의 열망이 가득했던 꿈꾸는 사람들의 동네
독재정권 시절 정동은 민주화의 열망으로 가득 찼던 곳이다. 1987년 6월항쟁은 정동에 있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에서 울린 42번의 종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그해 6월 10일 대한성공회 대성당에 숨어든 재야인사 20여 명은 종탑에 올라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낭독한 뒤 타종했다. 해방 이후 42년이 되는 해에 민주주의를 쟁취하자는 뜻이 담긴 42번의 종소리는 맞은편 서울광장에 모인 100만 시민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대통령 직선제 도입 등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한 6월항쟁의 시발지가 정동이었던 셈이다.
정동은 언로(言路)가 열려 있는 곳이다. 정동제일교회 맞은편에는 <신아일보> 별관 건물이 있다. 1965년 창간된 <신아일보>는 ‘독자를 위한 상업신문’을 자처하며 신문을 발행하다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로 <경향신문>에 흡수·통합됐다. 정동길 끝자락(또는 들머리)에 있는 <경향신문>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민족정론지를 표방하며 창간됐다. 1974년 문화방송(MBC)과 통합하면서 소공동에서 정동으로 옮겨온 <경향신문>은 시대의 진실을 읽는 정론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거나 현재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정동, 깊이 알면 보인다
정동은 해마다 늙어가고, 해마다 젊어진다. 500년 넘게 정동길을 지키고 있는 회화나무가 매년 어김없이 새잎새를 내듯 정동은 자연의 시간을 받아들여 늙어가면서도 새로움을 추구한다.
정동의 사계절은 아름답다. 덕수궁 살구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릴 즈음이면 정동에는 봄 내음이 가득해진다. 싱그러운 녹음(綠陰)이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여름 정동길은 한가롭고 고즈넉하다. 노란 은행나무 잎이 향연을 펼치는 가을 정동은 한 편의 시(詩)가 되고, 노래가 된다. 정동의 겨울은 오가는 사람들의 온기와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이 있어 쓸쓸하지 않다.
정동길은 천천히 걸어야 제격이다. 그래야 정동의 어제와 오늘이 보이고, 정동이 말을 걸어온다. 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역사의 흔적과 추억, 낭만이 있는 정동, 탐닉(耽溺)해볼 만하지 않은가.